가인의 두번째 죄

무책임과 아우 지키기

복지국가는 효율성의 언어만으로는 방어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이유는 그 돌봄이 이익을 낳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형이고 아우이기 때문이다.
사회철학
Author

S. Park

Published

2022.11.01

Modified

2026.05.30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 창세기 4:9

1 복지는 쓸모로만 말할 수 없다

복지국가를 옹호하는 많은 주장은 대개 복지국가의 좋은 효과에서 출발한다. 복지는 빈곤을 줄이고, 사회갈등을 완화하며, 삶의 불확실성을 낮춘다. 일반적으로 이런 좋은 효과를 실증하는 많은 연구들이 있다.

그러나 복지를 “효과”의 언어로만 말하는 순간, 복지는 언제나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제도가 된다. 성과가 충분하지 않으면 축소되어도 되고, 대체재가 나타나면 밀려나도 되는 제도가 된다.

복지국가는 보호의 장치이지만, 동시에 분류의 장치다. 누군가를 제도 안으로 들이는 순간, 다른 누군가는 기준 밖으로 밀려난다.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사회는 자기 자신의 ’쓰레기’를 생산한다. 사회정책은 누군가를 보호하지만, 바로 그 보호의 기준을 통해 다른 누군가를 배제한다. 제도는 사람을 항목으로 바꾸고, 보호는 쉽게 감시와 낙인으로 변한다.

그럼에도 복지국가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서로의 삶에 이미 얽혀 있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이 지점을 정확히 찌른다. 그는 복지국가가 점점 “경제적으로 유용한가?”라는 질문 앞에 세워지고 있다고 보았다 (Bauman, 2000). 복지의 대상자는 시장의 게임에 참여하지 못해 사회 안에서 별 기능이 없는 사람처럼 취급된다. 그때 의존은 부끄러운 단어가 된다.

“Dependence has become a dirty word.”

의존은 이제 부끄러운 말이 되었다.

Bauman (2000), p. 5

그러나 인간은 원래 의존적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노인은 다음 세대에게, 환자는 의료진과 보험공동체에, 노동자는 경기변동과 산업구조에 의존한다. 나는 내 힘으로만 산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타인의 노동과 제도와 호의에 기대어 있다.1

시몬 베유가 말한 이웃 사랑도 이 지점에 있다.

이웃 사랑은 그에게 “무슨 일을 겪고 있습니까?”라고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이다.

— Simone Weil

사랑은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이다. 돌봄은 제도명, 수급자격, 경제적 효과보다 앞서 “무슨 일을 겪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데서 시작된다.

2 가인의 첫번째 죄와 두번째 죄

가인의 첫번째 죄는 분명하다. 그는 아벨을 죽였다.

하지만 창세기의 이야기는 살인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가인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답한다.

이 대답에는 가인의 두번째 죄가 있다. 그것은 무책임이다.

가인은 단순히 모른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아벨의 죽음과 자신의 관계를 “왜 그걸 나에게 묻습니까”라는 방식으로 끊어냈다.

바우만이 강조한 것도 이 지점이다. 책임은 먼저 계약이나 법적 의무의 형태로 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았고, 그 고통이 내 앞에 질문처럼 놓였다면, 나는 이미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 순간 “왜 내가 책임져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은 중립적인 질문이 아니라 책임을 피하는 방식이 된다.

“Dependence and ethics stand together and together they fall.”

의존과 윤리는 함께 서고, 함께 무너진다.

Bauman (2000), p. 5

그래서 가인의 역질문은 모든 무책임의 원형처럼 읽히는 것 같다. 적어도 바우만은 그렇게 읽은 것 같다.

현대사회는 이 말들을 더 그럴듯하게 만들어준다:

  • 내가 직접 굶기지 않았으니 상관없다.
  • 내가 직접 해고하지 않았으니 책임 없다.
  • 내가 직접 차별하지 않았으니 내 일이 아니다.

3 형이라는 자리

“형”은 먼저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만 갖지 않는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형은 언제나 권리와 책임이 함께 놓이는 자리다.

고대 근동의 장자는 단순한 출생순위가 아니었다. 그는 더 큰 몫을 받는 대신 더 무거운 책임을 떠안는 자리였다. 유월절의 “첫째”는 한 가정의 미래와 계승을 상징한다. 야곱과 에서의 장자권은 재산권만이 아니라 축복과 언약의 문제였고, 돌아온 탕자의 큰아들은 집을 지켰지만 동생을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야곱의 오른손은 므낫세가 아닌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놓였다.

조금 비약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맥락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형이기도, 동생이기도 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어떤 맥락에서는 부자가, 건강한 사람이, 안전한 사람이, 정규직이, 현세대가 형의 자리에 선다. 반대로 다른 맥락에서는 곧바로 아우가 된다.

우리는 고정적으로 형이거나 아우인 것이 아니다. 삶의 국면마다 서로가 서로에게 형이고 아우가 된다. 그래서 돌보고 살피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4 현대사회는 책임을 흐린다

문제는 현대사회가 이 책임을 점점 보이지 않게 만든다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책임의 경로가 길고 복잡하다. 내 소비, 내 투표,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편의가 누구의 위험 전가와 연결되는지 보이지 않는다.

복잡성은 책임을 없애지 않는다. 다만 책임을 흐리게 만든다.

바우만은 복지국가에 대한 공격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보았다. 과거 복지국가는 노동력 재생산, 국민통합, 사회안정의 측면에서 자본과 국가 모두에게 어느 정도 합리적인 제도였다. 실업자는 언젠가 다시 노동시장으로 돌아올 “예비 노동력”이었다.

하지만 노동시장이 유연화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더 이상 예비 노동력으로도 잘 보이지 않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회복되어야 할 시민이 아니라 사회 바깥의 “언더클래스”처럼 재분류된다. 사회가 자기 자신의 ’쓰레기’를 생산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장면을 상기시킨다. 사회는 자신이 만든 질서에 맞지 않는 사람을 바깥으로 밀어낸 뒤, 그 바깥을 다시 그들의 책임으로 돌린다.

노동시장 이중구조화도 본질적으로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누군가를 제도 안으로 들이는 순간, 다른 누군가는 기준 밖으로 밀려난다. 배제된 이들에게 비용을 전가하여 선택된 이들의 발전을 꾀하는 일은 자본주의 사회의 오래된 일반전략이었다.

5 결론

가인의 두번째 죄는 아우와 자신의 관계를 부정한 것이라고 해도 될까.

복지국가의 문제도 결국 이 두번째 죄와 맞닿아 있다. 복지국가는 선한 제도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호하면서 동시에 분류하고, 돌보면서 동시에 배제한다.

내가 그들을 돌보는 사람입니까?

References

Bauman, Z. (2000) Special Essay. Am I My Brother’s Keeper? European Journal of Social Work, 3, 5–11.

Footnotes

  1. 리차드 티트머스가 이 관계를 두고 “선물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우연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