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이 1명도 없어도 복지국가가 필요할까?

로빈 후드와 돼지저금통

서민이 서민을 싫어하고, 중산층이 중산층을 배제하고, 복지국가의 수혜자가 복지국가를 축소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복지국가가 필요하긴 한걸까? 답은 Yes. 이런 정치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공유되는 가치관과 철학적 합의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형식적일지라도 정치철학적 합의가 없다면, 결국 관련한 모든 명제는 포퓰리즘의 벽을 넘지 못한 채 그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게 된다.
고찰
Author

S. Park

Published

2025.04.11

1 한국 복지국가의 쓸모?

한국사회는 복지국가의 쓸모를 묻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 사회다:

  • 최저임금협상 테이블은 항상 뒤엎어지고,
  • 부정수급 문제는 국민 서로를 감시자로 만들며,
  • 국민연금은 제도개혁이 거듭될수록 세대 싸움을 부추긴다.

이런 것만 보면 복지국가는 오히려 사회를 분열시키는 제도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1 복지국가가 강한 국가일수록 파업은 덜 갈등적이고, 정당 간에 더 통합적인 경향이 있다.

따라서 물어야 하는 질문은 복지국가의 쓸모가 아니라, 한국 복지국가의 쓸모이다.

2 복지국가의 쓸모를 해부하기

복지국가의 쓸모에 대한 갈등은 한 군데 같지만 사실 세 군데서 발생한다:

  1. 복지국가가 필요한가? → 역사적 갈등
  2. 어떤 복지국가가 필요한가? → 정치적 갈등
  3. 어떻게 해야 달성되는가? → 기술적 갈등

이것을 이해하는게 첫 단계이다. 복지국가의 쓸모 문제는 종목별로 분리해서 따져봐야 한다. 특히,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복지국가의 쓸모를 둘러싼 논쟁이 혐오로 번지는 것을 막아주고, 논의를 더 생산적이고 실질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2.1 복지국가가 필요한가?

사실, 복지국가가 필요한지에 대한 싸움은 이미 끝났다. 복지국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겼다. 앞으로 기술발전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에 따라 어쩌면 판정이 뒤집힐 수는 있지만, 적어도 20-21세기 기술 수준으로는 복지국가가 필요하다. 손이 투명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의 의무는:

  • 첫째, 폭력과 침입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고,
  • 둘째, 부정의와 억압으로부터 사회 구성원을 보호하는 것이며,
  • 셋째, 대규모 사회에는 매우 유익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이나 소수에게는 그 비용을 부과할 수 없는 공공제도와 시설을 설립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 Adam Smith (1776)

쉽게 말해 국민에게 엄청 유익하지만 일반적인 민간회사는 굳이 할 이유가 없는 제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 좋으라고 도로를 깔고 물과 전기를 저렴히 공급하겠는가? 비슷한 예로 건강보험이 있다. 국민연금처럼 말이 많긴 하지만, 적어도 없애자는 사람은 없다. 건강보험은 국민의 삶의 질 개선에도 기여할 뿐만 아니라, 제약산업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한다.2

복지국가를 옹호하는 것이 자유의 가치를 폄하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복지국가 옹호자는 자유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는다. 단지, 그 자유라는 것은 굉장히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공정한 시장경쟁을 위해서는 시장참여자가 동시에 서로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20-21세기 기술로는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자유의 추구가 통제로 귀결되는 모순도 존재한다. 만약 기술발전으로 어떤 완전무결한 플랫폼이 등장하여 Know each others all at once 를 달성할 수 있다고 광고하여, 전세계 모든 이들이 이 플랫폼에 강제로 가입해야 한다면 그것을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플랫폼 개발자, 관리자가 너무 과대하고 불균형한 힘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 보자면, 시장은 오히려 손이 많이 간다. 정보 불완전성, 거래비용, 외부효과 등 많은 부분에서 돌봐줘야 한다. 이 돌봄은 자연히 국가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외려 시장이 인위적이고 국가는 자연발생적이다. 20세기 헝가리의 위대한 경제학자 칼 폴라니의 통찰이다.

이런 점에서 21세기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는 복지국가를 갖고 있다. 그 크기가 다를 뿐이다.

2.2 어떤 복지국가가 필요한가?

이제 우리는 복지국가의 존재에 동의했다. 그러나 어떤 복지국가가 필요한지는 아직 모른다.

복지국가같은 거창한 단어 대신 복지정책를 사용해서 문제를 좁혀보자. 얼추 윤곽이 잡힌다. 복지정책은 일반적으로 2가지 타입으로 구분한다:

  • 로빈 후드
    부자로부터 가난한 자들에게 소득과 부를 재분배한다. 로빈 후드나 홍길동, 또는 장화신은 고양이는 나쁜 양반집, 소위 탐관오리집을 털어 필요한 이웃에게 나누었다.

  • 돼지 저금통
    쉽게 말해 보험. 교통사고, 실직 등의 위험으로 인해 우리 삶엔 늘 불안정성이 존재한다. 보험은 이 불안정성을 해소해준다. 보험이 왜 복지제도인지 의문이 든다면, 건강보험을 떠올려보자.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와서, 복지국가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고양이와 돼지의 비율이다. 어떤 국가는 모든 국민이 돼지저금통을 1개씩 다 갖고 있다. 반면 어떤 국가는 직종이나 지역마다 별도로 관리한다. 또 어떤 국가는 고양이 중심적인 반면, 고양이 비중이 낮고 돼지 중심적인 국가도 있다.

불확실한 위험의 종류도 여러가지다. 교통사고는 일평생 한 번도 겪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은퇴는 누구나 겪는다. 산업사회에서 은퇴는 위험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복지국가를 말할 때, 어떤 복지국가를 말하는지 되물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복지국가를 선호할지는 순전히 정치철학적 선호에 해당한다. 어떤 복지국가가 필요한지는 이념적이고 정치철학적인 과정을 거쳐 합의를 이룬다. 즉, 어떤 복지국가를 선택할지는 합의가 필요한 가치선택에 해당한다.

만약 이 합의가 생략된 채로 대화를 시작하면 복지국가라는 단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생각하고 말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이미 이런 경험을 갖고있다. 서민은 누구를 말하는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중산층인가? 형식적이나마 명확한 정치철학적 합의가 없다면, 결국 관련한 모든 명제는 포퓰리즘의 벽을 넘지 못한 채 그저 이용당하게 된다.

2.3 어떻게 해야 달성되는가?

1과 2의 싸움이 끝나고 합의를 이루면, 3은 사실 싸움도 아니다. 3은 경제학적이고 기술적인 영역이다.

1이 철학의 영역, 2가 정책의 영역이었다면, 3은 제도의 영역이다. 어떤 복지국가를 만들 것인지 정치철학적 합의가 선결되면 나머지는 제도를 어떻게 최적화 시킬지의 몫이다. 복지국가를 없애거나, 복지국가의 성격을 바꾸려는 갈등이 아니다. 제도 최적화의 갈등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1. 복지국가를 실현할 것인가?
  2. 복지국가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3. 복지국가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3 복지국가 쓸모 논쟁의 실체

한국사회는 이 세 싸움이 한데 뒤엉켜있다는 점이 문제다. 만약 전국민이 국민연금의 존재, 다시 말해 국가주도적 노후대비 돼지저금통의 필요성 대해 정치적 공감대를 갖고 있다면, 국민연금 논쟁은 세대 간 갈등이 아닌 헙력으로 발현되었을 것이다. 모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제도 존립을 위한 강구책을 함께 고민하게 된다. 사례도 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건강보험이 좋은 사례이다. 건강보험을 둘러싼 그간의 논쟁들은 건강보험제도를 어떻게 최적화시킬지에 대한 논의였지(급여-비급여 부문조절 등), 건강보험 폐지 논쟁인 적은 없었다.

반면 이 합의가 없으면 어떨까? 국민연금을 폰지사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보험료를 조절하고 소득대체율을 손보는 등 모든 정책결정들은 반감만 살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제도적 행위는 갈등을 촉진시킨다. 때문에 마치 복지제도가 갈등을 유발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급기야는 정치인에게 있어서 국민연금 입안활동은 덜 인기있는 작업으로 여겨진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온전한 지지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언급 자체가 부담스럽다. 결국 국회에서는 다른 인기있는 법안들 뒤로 우선순위가 밀리게 된다. 국민연금 개혁은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이다.

우리사회는 아직 어떤 복지국가가 필요한지 정치철학적 합의를 찾지 못했다. 아직 분배갈등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이 합의점을 먼저 찾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어떤 복지국가도 아니게 되어버린 채로 멈추기 때문이다.

국회는 정치철학적인 주제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세속적인 주제에 몰두한다. 돼지저금통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말하기보다는, 돼지가 얼마나 살쪘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네 복지국가 논의는 정책의 부재가 아닌, 철학의 부재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것.

4 부자도 돼지저금통이 필요하다.

여전히 우리는 “게으른 사람들을 위해 왜 세금을 내야하는가?” 같은 고루한 문제로 싸운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를까?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사람은 없을까? 시간 당 1억을 버는 사람이 하루 1시간만 일한다면, 게으른 사람일까? 가난은 능력에서 오는가? 이 문제도 능력주의문제와 함께 복지국가 연구의 거대한 한 축이다. 이쪽 분야 연구들의 핵심쟁점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능력주의에서 말하는 “능력”은 노력의 총량으로 보는 관점, 결과의 총량으로 보는 관점, 그것도 아니면 그냥 IQ 같은 지능지수로 보는 관점들이 뒤섞여 있는 모호한 개념이라는 점이다.

어쨋든, 지나친 빈곤과 불평등은 전체의 번영을 막는다는 것은 어느정도 합의를 이룬 명제다. 로빈 후드 기능은 이 명제에 의해 정당화된다.3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만약 빈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다시 말해, 사회에 가난한 사람이 모두 없이, 용인할 수준 정도의 불평등만 약간 있다면 어떨까? 빈곤의 종말은 곧 복지국가의 종말인가?

그렇지 않다. 빈곤전쟁의 승리국도 여전히 돼지저금통 기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노후대비를 “내돈내산 저금통”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돼지 저금통 기능마저 필요 없어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그렇게 “내돈내산”으로 다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스스로가:

  1. 언제 아플지(암, 심장, 뇌혈관 등),
  2. 언제 다칠지(자동차사고, 산재사고 등),
  3.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얼마나 사기당할지,
  4. 회사가 나를 언제 자를지,
  5. 내가 언제 가난할지,

등의 시점과 손실수준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내돈내산 저금통”으로 완전히 충분하다. 다음 주 화요일에 다리 골절로 병원비 50만 원 지출이 정확히 예측된다면 오늘부터 미리 모으면 된다. 13년 후 내가 부자가 될 것임이 정확히 예측된다면 오늘 그다지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 또는 스릴을 즐기는 사람에게도 이런 삶은 나쁘지 않은(?) 삶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보험에 가입한다. 문제는, 이 보험은 위에 1~5에 대하여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손은 그런 돼지 저금통을 안판다. 사기꾼이 잔뜩 남게 되고 보험료와 보험금에 수지타산이 안맞게 되어 결국 보험회사가 문을 닫는다. 사고, 상병, 실업 등을 생각해보자.

노후 은퇴문제는 조금 특수하다. 사고, 상병, 실업과는 다르게 언제 일어날 지는 아는 일이니까.4 그래서 이런 돼지 저금통은 시장에서 판매한다. 작동도 잘 한다. 그러나 어느 저금통이 잘 작동할지에 대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어쨋든 우리는 돼지와 고양이가 모두 필요하다. 가난한 사람이 1명도 없어도 여전히 복지국가는 필요하다. 재분배는 부자와 빈자 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생애 가운데서도 필요하다. ’로빈후드가 타임머신을 타면 돼지저금통이 된다’고 표현해볼까.

5 마무리

복지는 제도가 아니라 철학이다. 그리고 철학 없는 복지는, 혐오와 포퓰리즘에 의해 사라진다.

가난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해도, 복지국가는 여전히 필요하다. 복지는 단순히 ’없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인생’에 대응하는 공동의 장치다. 우리는 누구나 늙고, 아프고, 때로는 실패한다. 그래서 복지는 일종의 돼지저금통이고, 이 돼지저금통은 부자에게도 필요하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이 돼지저금통을 ’게으른 사람을 위한 것’으로만 바라보는 프레임이다. 결국 제도 설계의 문제라기보단, 복지를 바라보는 철학 자체가 부재한 데서 갈등이 비롯된다.

한국의 복지 논쟁은 세대 간, 계층 간 혐오로 자주 번지지만, 진짜 이유는 우리 사회가 ’어떤 복지국가를 원하는가’에 대한 합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제도 설계를 논하려면 그 이전에 정치철학적 질문이 필요하다. 복지국가는 지금 존재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설계되고, 어떤 철학으로 정당화되는가의 문제다. 철학 없는 복지는 포퓰리즘의 먹잇감일 뿐이다.

6 상상

칼 마르크스는 1883년에 사망했다. 의미심장하게도, 같은 해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태어났다. 자본은 노동과 협상하는 법을 배웠고, 세상은 파국 대신 회복을 택했다. 케인즈는 1946년에 사망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같은 해에 도널드 트럼프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자본의 역습일까? 아니면 또다른 협상일까?

이제 복지국가는 어디로 가는가? AI한테 물어봤더니 뜬금없이 소설을 써왔다. 그런데 나쁘지 않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해방의 혁명을 꿈꿨고, 케인즈는 자본주의를 조율해 안식을 선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율은 제도화되고, 혁명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러던 중 태어난 트럼프는 이념 없이 분열과 불안을 팔며, 노동자의 얼굴을 한 자본의 가면이 되었다. 그는 붉은 모자를 쓰고 ‘일자리를 지키겠다’ 외쳤고, 사람들은 그를 믿었다. 혁명의 언어는 잊혔고, ’계급’은 교과서에만 남았다. 세상은 이제 혁명도, 조율도 아닌, 자본이 분노를 연기하는 무대로 변했다.”

— ChatGPT

Footnotes

  1. 복지제도가 사회를 분열시키는지, 아닌지에 대한 음모론(?)은 생각보다 많이 연구되어 있다. 사실, 제도와 갈등 사이의 관계는 사회정책분야 연구의 거대분야 중 하나다. 그 어떤 사회정책 연구도 저마다 조금씩은 이 영역에 속해있다. 내 핵심 연구주제도 예외는 아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른 글에서 깊게 다룰 것이다.↩︎

  2. 미국은 병원별로 환자데이터가 집계된다. 반면 한국은 중앙 한 군데 모인다. 제약산업은 기본적으로 약물역학이 베이스인데, 약물역학 학계에서 전국민 통합데이터의 위용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3. 물론, 방빈이 이렇게만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4. 이제는 실업도 무조건 일어나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